엔비디아의 Arm 인수·합병은 2020년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반도체 업계 M&A 거래였다. Arm은 RISC 기반의 ISA인 'Arm 아키텍처'를 1990년부터 업체 차별 없이 라이선스 제공하여 해당 분야의 암묵적인 표준으로 자리 잡은 기업이다. 2010년, UC 버클리에서 시작한 RISC 기반의 개방형 ISA인 'RISC-V 아키텍처'는 해당 M&A 소식에 대체재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엔비디아, 소프트뱅크로부터 Arm M&A
대안으로 개방형 ISA, 'RISC-V' 주목 받아
M&A 완료 전까지 Arm 사업 유지 전망
2020년은 2015년에 이어 반도체 기업 간의 인수·합병(M&A) 거래가 많았던 해였다.
아날로그 반도체 업계 2위인 아나로그디바이스(ADI)는 지난 7월, 같은 업계 7위인 맥심 인터그레이티드를 인수·합병했다. 10월에는 SK하이닉스가 인텔의 스토리지와 낸드플래시 부문을 인수했고, 네트워크 반도체를 주력으로 하는 마벨은 경쟁사인 인파이를 인수·합병했다. 또한, CPU 기업인 AMD가 FPGA 기업인 자일링스를 인수·합병했다.
그중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거래는 9월에 있었던 엔비디아의 Arm의 인수·합병이었다. 엔비디아는 2020년 7월, 인텔을 제치고 미국 반도체 기업 시가총액 1위에 오른 GPU 전문 기업이며, Arm은 저전력 반도체 IP 코어를 설계하고 이를 타 기업에 라이선스로 판매하는 기업이다. 대표작으로 스마트폰이나 IoT 코어로 활용되는 ‘Cortex(코어텍스)’ 제품군이 있다.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합병하기 위해 소프트뱅크에 지급할 금액은 400억 달러로, 소프트뱅크가 2016년에 Arm을 인수·합병할 때 썼던 320억 달러보다 80억 달러 많다. 관계 당국의 승인만 떨어진다면, 해당 거래는 역대 반도체 M&A 규모 중 최대를 기록할 전망이다. 인수·합병 금액이 이렇게까지 올라간 것은 Arm의 영향력이 반도체 업계에서 막대하기 때문이다.
◇ 엔비디아 산하로 들어간 Arm, 달라질 건 없다?
Arm은 반도체를 직접 만들거나 설계하지 않고, 타 기업에 축소 명령어 집합 컴퓨터(Reduced Instruction Set Computer; RISC) 기반의 명령어 집합(Instruction Set Architecture; ISA)인 ‘Arm 아키텍처’의 라이선스를 판매한다.
아콘, 애플, VLSI(현 NXP)의 조인트 벤처로 1990년 설립된 Arm은 업체 차별 없이 Arm 아키텍처를 제공하여 RISC ISA 분야의 암묵적인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RISC ISA는 x86으로 대표되는, 명령어 길이가 제각각이라 최적화하기 어려운 복잡 명령어 집합 컴퓨터(Complex Instruction Set Computer; CISC) ISA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1980년에 제안되어 오늘날까지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다.
▲ Arm 기반 칩은 지난 5년간 1천억 개 이상이 출하됐다 [그래프=Arm]
저전력 기반의 Arm 아키텍처는 2010년부터 스마트폰 AP(Application Processor)에 채용되며 인지도를 높여왔다. Arm은 지난 11월, 5년 동안 약 1,000억 개의 Arm 아키텍처 기반의 반도체가 출하됐고, IoT 및 웨어러블 기기 등에도 널리 채택되고 있다고 밝혔다.
사실상 표준의 위치에 있기에, Arm이 시장에 나오자 어느 기업이 인수하냐가 반도체 업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새로운 주인으로 엔비디아가 결정되자 일각에선 엔비디아가 Arm의 지적 재산권(IP)을 타 기업에 제공하는 것에 제약을 걸 수도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이에 엔비디아의 젠슨 황(Jensen Huang) CEO는 “엔비디아는 기존 Arm 비즈니스를 유지할 것”이라며 세간의 걱정에 선을 그었다. 엔비디아가 Arm IP의 가격 상승과 수급 불안을 일으킨다면, 기업들의 경각심만 높여서 RISC-V(리스크파이브) 등의 경쟁자만 성장하게 될 것이다.
◇ RISC-V, 잠재력 있으나 에코시스템 절실해
RISC 기반의 개방형 ISA인 RISC-V 아키텍처는 Arm 아키텍처의 잠재적인 경쟁자로 꼽힌다. RISC-V 프로젝트는 2010년, UC 버클리에서 크르스테 아사노비치(Krste Asanović) 교수와 당시 박사과정이었던 이윤섭, 앤드류 워터맨(Andrew Waterman)이 시작했다.
▲ 2013년 1월 공개된 RISC-V 실험용 제품 [사진=RISC-V]
소프트뱅크에 Arm이 인수·합병된 2016년, 60여 개 기업의 후원을 받아 RISC-V 재단이 공식 출범했다. 현재는 RISC-V 인터네셔널로 사명을 바꾸고 본사를 스위스로 옮겼고, 사이파이브, 웨스턴디지털, 안데스 테크놀로지, 알리바바 클라우드 등 500여 개 회원사가 등록되어 있다.
Arm의 주 수익원은 IP 라이선싱, 로열티, 그리고 커스텀 반도체 설계다. 만약 Arm 회원사가 자사 제품의 목적에 맞는 반도체를 설계하고 제작하기 위해 Arm IP의 변경과 응용을 원한다면, 고가의 추가 라이선스를 별도로 얻어야 한다. RISC-V 아키텍처는 그럴 필요가 없다. 설계된 ISA는 버클리 오픈 소스 라이선스로 무료로 쓸 수 있게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RISC-V 아키텍처는 아직 완성형 ISA라 할 수 없다. 추가되고 개선돼야 할 IP 라이브러리가 많다. RISC-V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ISA의 완성도 이상으로 ISA가 사용되는 애플리케이션 에코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시게이트는 지난 12월, 온라인으로 개최된 ‘RISC-V 서밋 2020’에서 RISC-V 아키텍처 기반의 프로세서 2개를 설계하고 제작에 들어갔다 밝혔다. 이는 2가지 사실을 시사한다. 첫 번째는 RISC-V 아키텍처의 상용화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Arm 아키텍처가 주류를 이루는 기존 시스템과의 호환성 문제로 RISC-V 아키텍처를 채용하는 반도체는 아직까진 내장된 장치를 제어하는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 Arm Vs. RISC-V, M&A 완료까지 본격화 안 돼
아직까지는 애플리케이션 에코시스템이 미흡하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지만, RISC-V 아키텍처는 개방형 ISA라는 점에서 비용적인 강점이 있다. 외연 확장을 위해 Arm은 2019년 7월, 플렉서블 액세스(Flexible Access)라는 계약 모델을 선보였다.
사전 라이선스 구매 없이 Arm IP 포트폴리오, 지원, 도구, 훈련 자원 중 75% 이상을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계약 모델인 플렉서블 액세스는 노르딕, 패러데이, 소시오넥스트, 아트모직, 하일로와 같은 기업들은 물론, 우리나라의 중소벤처기업부 같은 기관 등도 이용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최대 500만 달러 이하의 자금을 보유한 스타트업 전용의 플렉서블 액세스도 선보였으며, 11월에는 에지 AI 처리 수요 증가에 따라 AI 성능을 강화한 Ethos-U NPU와 Cortex-M MCU IP들을 출시하자마자 플렉서블 액세스에 포함한다 밝히기도 했다.
▲ 두 아키텍처는 대결보단 보완제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로고=Arm, RISC-V]
엔비디아가 기존 Arm 비즈니스를 유지하기로 한 만큼 Arm 및 RISC-V 아키텍처의 시장점유율은 현 상태를 유지할 전망이다. 해당 M&A 작업이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되는 2022년 2분기까지 반도체 업계와 규제 당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엔비디아가 Arm IP의 가격 상승과 수급 제한 카드를 꺼내 들 가능성은 현재로선 낮다.
다만, 이미 미국의 제재 아래 반도체 분야서 큰 타격을 입고 있는 중국이 미국 기업인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합병하는 것을 승인할지 말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