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통신의 역사는 인간의 연결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역사입니다. 선사 시대부터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통신의 기능은 소통과 약속의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888년 조선시대 전기통신이 최초 도입됐으며, 해방 후 1980년대 통신사업과 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정보화 시대가 개막했습니다. 이제 5G, 6G 시대를 맞아 차세대 통신이라 꼽히는 위성통신, 양자통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AI)·로봇·클라우드·UAM 등 첨단 기술 발전과 함께 통신은 점점 중요해지며, 끝없이 발전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통신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져 있는 가장 기본이 되는 동시에 핵심이 되는 기술입니다. 본지는 이번 기획 시리즈를 통해 통신의 역사부터 소소한 사건, 기술, 트렌드까지 통신과 관련된 이모저모를 다뤄보겠습니다.
▲우정총국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해방 전후 전기통신, 잿더미 속에서 일군 성과
일본의 통신권 박탈부터 국내 통신기술의 태동기까지
[편집자주] 통신의 역사는 인간의 연결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역사입니다. 선사 시대부터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통신의 기능은 소통과 약속의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888년 조선시대 전기통신이 최초 도입됐으며, 해방 후 1980년대 통신사업과 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정보화 시대가 개막했습니다. 이제 5G, 6G 시대를 맞아 차세대 통신이라 꼽히는 위성통신, 양자통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AI)·로봇·클라우드·UAM 등 첨단 기술 발전과 함께 통신은 점점 중요해지며, 끝없이 발전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통신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져 있는 가장 기본이 되는 동시에 핵심이 되는 기술입니다. 본지는 이번 기획 시리즈를 통해 통신의 역사부터 소소한 사건, 기술, 트렌드까지 통신과 관련된 이모저모를 다뤄보겠습니다.
■ 일제 강점기, 통신권을 박탈당하다
현대인에게는 이동을 하며 전화를 하고, 멀리 있는 통신할 수 있다는 점이 당연한 요소지만, 100년 전에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세기 말 발명된 전화는 특권이었다. 전화기는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구를 살린 한 통의 전화기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1896년 8월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범 스치다 조스케에 분개해 그를 살해(치하포 사건)해 체포된다. 김구는 인천 감옥에 수감중이었고, 일제에 의해 처형을 앞두고 있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옥죄어 오는 가운데, 고종 황제는 일본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김구의 처형을 망설였지만, 이내 덕수궁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 전화기를 이용해 인천 감옥에 직접 전화를 걸어 처형을 중단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전화기는 대한제국이 근대화를 위한 싹이 움트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석방돼 목숨을 건진 김구가 적극적인 독립운동의 선봉장이 됐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과학기술 발전의 꽃을 피울 무렵, 일본은 우리나라의 통신권을 박탈하기 이전부터 은밀하게 한국의 통신권 침해를 시작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 인천, 원산의 항구가 강제 개방됐다. 일본은 세 도시에 일본인 거류지를 만들었고, 치외법권을 이용해 일본 우편국을 강제적으로 세웠다.
또한 1891년에는 서울에 ‘인천우편국 경성출장소’를 설치했다. 일본의 통신기관 수를 차츰 늘린 결과, 1984년 우리나라에는 일본 우편국이 무려 29개에 달했고, 10년 동안 약 89개소로 늘어났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 후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 체결을 강제해 통신기관을 점거했다. 일본은 전파통제를 위해 무선통신 시설 및 조직을 조선총독부 체신국 산하에 뒀다.
일제 강점기 통신권을 박탈당한 우리 민족은 해방 전까지 전화 기술을 발전시킬 기회를 잃게 됐다. 통신기관은 착취의 도구로 사용돼 1931년 만주사변 발발 후, 대륙과의 통신거점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우체사와 전보사에 근무했던 체신인들은 일본에 맞서 싸웠다. 예컨대 1905년 통신기관이 탈취당했을 때, 한성우체사와 한성전보사의 관원 44명은 전원 사직을 통해 투항의 의지를 내비쳤다.
일부 지방에서는 대부분 간부는 봉급을 인사해주겠다는 말에도 굴하지 않고 관리직을 내려놓기도 했다. 또한 의병의 항거로 1907년 통신기관의 23% 이상이 의병의 습격을 받아 폐쇄당하기도 했다.
■ 우리나라 최초 전화기는 언제?
▲벽걸이 자석식 전화기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1800년대 전기통신의 도입 이후 과학기술의 빠른 발전은 통신 수단을 급속히 변화시켰다. 전기를 통신에 이용하게 되면서 다양한 통신 매체가 발명됐고, 이러한 발명품들이 현재의 통신 매체의 바탕이 됐다.
우리나라에서 무선통신이 최초 사용된 기록은 1908년 일본 체신성과의 통신이다. 자체적으로 무선전보를 도입한 것은 1910년 9월로 기록돼 있다. 정부의 항로표지감시선인 광제호와 월미도에 설치된 무선전신소와 교신을 함으로써 무선통신을 시작했다.
1876년 전화기의 발명 이후 사용된 건 수동식 전화기였으나, 1892년부터 자동교환기가 사용되며 전화의 보급이 늘어나게 됐다. 전화기는 수동식 교환기와 자동식으로 나뉘는데, 수동식 전화기는 전화 상대방을 교환원이 연결해주는 방식으로, 여기에는 핸들을 돌려 교환원을 호출하는 자석식과 전화 수화기를 들면 교환원이 호출되는 공전식이 있다. 또한 자동식은 다이얼을 회전해 전화를 걸기 때문에 다이얼식 또는 기계식이라고도 불리며, 버튼식 다이얼은 전자식으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도입된 에릭슨사의 자석식 전화기는 수동식의 100회선 용량이었다. 이어 한성전화소와 인천전화소에 도입된 전화기는 각각 10회선과 50회선의 용량이었다. 이후 전화 교환은 점점 대용량화 되며 자동교환기는 진화를 거듭했다.
자동교환기는 1935년 3월 최초 나진우편국에 설치됐고, 같은 해 10월 경성중앙전화국에 설치됐다. 해외에서도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트랜지스터와 IC가 자동교환기의 두뇌인 계전기 대신 도입되기 시작됐다. 반도체의 진보는 이후 등장한 컴퓨터와 교환기의 결합이 가능하게 했고, 정보통신이 고도화가 본격 꽃피게 됐다.
■ 해방 후, 전기통신 본격화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자주적인 전기통신사업이 추진됐다. 그러나 기술, 재정의 부족으로 유지 보수에 어려움을 겪고, 6·25 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전쟁 후 통신시설은 작전수행용으로 징발됐고, 최대 90% 가까이 파괴됐으며, 이는 1950년대 후반에나 복구가 됐다.
1960년대 들어서 정부는 전기통신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기통신법과 전파관리법을 제정하며 국내 전기통신 도입을 위한 첫 삽을 펐다. 일제 강점기의 법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과 맞물려 통신사업이 본격 시작됐다. 서독, 미국 등 52개국과의 전화가 개설됐고,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됐다. 1962년에는 자동식 전화교환기가 국내 생산됐고, 1979년에 전자식 교환기가 설치됐다.
경제 성장과 더불어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 통신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제 사람들은 이동 중에도 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1984년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식회사의 설립 이후, 드디어 1988년 휴대전화 서비스(1G)가 개시됐다.
다음 편에는 이동통신서비스가 개시되고 1세대부터 현재 5G에 이르기까지의 통신 역사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