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급 불안정에 서구권 국가들이 대만과 한국에 맡겨왔던 반도체 생산을 내재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미국이 가장 적극적이다. 반도체 자립은 물론, 중국 견제에도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역시 미국에 협조하며 자국의 소부장 경쟁력을 기반으로 과거 반도체 강국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국, 자국 내 팹 유치 및 동맹국 팹 건설 지원
중국, '30년까지 반도체 자립 목표하나 쉽지 않아
일본, 소부장으로 '80년대 반도체 경쟁력 되찾는다
차량용 반도체부터 출발한 전체 반도체 공급 불안정에 서구권 국가들이 그간 대만과 한국에 맡겨왔던 반도체 생산을 내재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은 TSMC, 삼성전자 등 파운드리 기업들의 팹을 자국 내에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인 구애에 나서고 있다. 또한, 미국은 중국에 대한 견제를 멈추지 않고 있다.
▲ 반도체 공급 불안정 해소 이슈가 미중 갈등으로 연결된 상태다
[그림=픽사베이]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외교와 안보, 가치와 이념은 물론, 디지털 문명의 핵심인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경제와 기술 문제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중국과 일대일로 맞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달리 중국을 포위하고 압박하기 위해 동맹을 모으고 있다. 미국은 EU 등과 함께 인권 문제를 들어 중국 제재를 발표했고, 중국 견제를 위한 미국 주도의 안보 협의체, ‘쿼드(Quad)’ 정상회의도 개최했다. 쿼드에는 일본, 인도, 호주가 참여했다.
2021년 2월, 바이든 대통령은 글로벌 원자재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후 미국은 중국 반도체 굴기를 꺾기 위해 화웨이 등 여러 기업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미국 정부는 현재 2조2,500억 달러(약 2,500조 원) 규모의 슈퍼 인프라 투자계획을 논의하고 있으며, 여기에 반도체 기술부서 창립을 위한 500억 달러(약 56조) 규모의 자금 지원방안도 포함했다.
◇ 중국 근처 반도체 라인도 흩트리려는 미국
중국은 14% 수준에 불과한 반도체 자체 수급 역량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국 최고의 명문인 칭화대학에 반도체 단과대학을 설립한 것은 그 일환이다. 중국 정부는 2030년까지 중국 반도체 산업을 세계 선진 수준으로 도약시키고 일부 기업을 선두 대열에 포진시키겠다는 계획을 지속 추진 중이다.
한편, 화웨이의 칼 송(Karl Song) 글로벌 대외협력 및 커뮤니케이션 사장은 지난 12일, 최근의 반도체 품귀 현상 책임이 미국이 자사를 제재했기 때문이라 비판했다. 다른 중국 기업들이 화웨이 제재 사례를 보고 반도체 사재기에 나서면서 품귀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중국 기업들의 불안감은 현재 진행형이다.
미국은 대만, 한국 등 반도체 첨단공정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의 미국 내 신규 생산시설 투자를 유도해 자국 내 반도체 가치사슬 경쟁력을 확대하고, 중국을 견제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유럽 등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자국 중심의 생산 인프라 거점 전략을 추진 중인데, 기존 팹리스 중심의 설계에 집중된 상태에서 실제 반도체 생산을 통해 공급망을 구축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또한, 미국은 중국에 근접한 반도체 라인의 분산도 추진 중이다. 인텔은 이스라엘에 2억 달러(약 2,230억 원)를 들여 반도체 연구개발 센터를 설립하고, 100억 달러(약 11조 원)를 들여 신규 팹을 건설할 예정이다. 중국도 반도체 기술 개발 및 자국 내 팹 건설 및 유치를 본격화하고 있다. TSMC는 중국 난징에 28억 달러(약 3조 원)를 들여 28nm(나노미터) 반도체 라인을 증설할 계획이다. 다만 팹 유치와 달리 건설은 미국이 반도체 원천기술들을 다량 보유 중이라 쉽지 않을 전망이다.
◇ 일본, 반도체 소부장 경쟁력의 제품화 꿈꿔
1980년대, 일본은 산업용 컴퓨터, 서버용 메모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88년에는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의 50.3%를 점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의 중심이 1990년대 PC용 CPU, 2000년대 모바일용 AP 등으로 옮겨갔고, 메모리 경쟁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에 뒤처지며 일본 반도체 세계 시장 점유율은 2019년 10%로 1/5 토막이 났다. 반도체 10대 기업도 6개에서 1개로 줄었다.
그럼에도 반도체 장비 및 소재 분야에서는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도쿄일렉트론은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네덜란드 ASML에 이은 세계 3위의 전 공정 장비 업체다. 실리콘 웨이퍼 분야에선 신에츠 화학공업과 섬코가 세계 시장 점유율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포토레지스트 소재의 경우 JSR, 도쿄오카공업 등이 90%의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3월, 반도체 산업의 해외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일본 내 첨단 반도체 생산체제를 정비하고 확대하는 민관 참여 공동사업체 신설을 발표했다.
캐논, 도쿄일렉트론, 스크린 3개 사는 산업기술종합연구소와 협력해 첨단 반도체 개발을 밝혔다. 경제산업성은 이번 계획과 추진에 약 420억 엔(약 4,303억 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3개 업체는 기판에 회로를 만드는 전 공정 관련 기술 개발에 협력하고, 산업기술종합연구소가 이를 제품 상용화로 연결하는 복안이다.
일본 정부는 4월, 미국과 정상회담에서 양국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5G, 6G, AI, 반도체, 양자 컴퓨터 등 첨단 디지털 분야 공급망 강화와 공동 연구에 나서기로 했다. 3일에는 반도체를 포함해 통신, IT, 원자력 등의 분야 기업에 경제 안보 담당 임원 신설도 요청했다. 이는 미중 갈등이 심화하는 가운데 일본 기업의 기술 유출을 방지하고, 중국에 의존하지 않는 공급망을 확보하려는 행보로 풀이된다.
이와 함께 올해 내로 국가안전보장국, 경제산업성 등 관련 부처와 경제단체연합회 등 주요 단체가 참여하는 경제 안보 관련 협의 채널 마련 방안도 구상 중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미중 갈등 격화에 전 세계 주요국의 반도체 자립화 및 주도권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일본도 미국에 편승해 과거 위상 회복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우리 정부와 기업 역시 현 상황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국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 강화에 실질적으로 도움될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