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용 반도체 수급 사정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업계에선 수급 대란이 주요 반도체 업체의 수요 예측 실패에 있다고 분석했다. IHS 마킷은 당장 이달부터 생산 라인을 증설해도 생산까지 최소 6개월 이상 걸리기 때문에 이번 대란이 3분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차량용 반도체는 당장 수익성이 크지 않아 반도체 업체들이 생산 라인 증설에 망설이고 있다. 하지만 레벨3 자율주행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지금보다 7배 많은 수의 반도체가 자동차에 탑재될 것으로 예상돼 시장 전망이 밝다고 볼 수 있다.
차량용 반도체 대란, 올 3분기까지 지속
업체 예상보다 빠른 경기회복이 대란 원인
당장은 불투명, 장기적으로 시장 확대 전망
차량용 반도체 수급 사정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업계에선 현재의 수급 대란이 주요 반도체 업체의 수요 예측 실패에 있다고 분석한다.
▲ 자동차와 반도체는 이제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이미지는 삼성전자 디지털 콕핏 [사진=삼성전자]
전 세계 자동차 판매량은 2019년 12월 말 810만 대에서 팬데믹이 절정에 달했던 2020년 4월 말 400만 대로 급감했다. NXP, 르네사스, 인피니언, TI, 마이크로칩 등 주요 차량용 반도체 업체는 차량용 반도체 생산 주문을 줄였고, 위탁생산을 맡았던 TSMC 역시 해당 생산 라인을 타 분야 반도체 생산으로 돌렸다.
차량용 반도체 업체들의 감축 결정은 완성차 업체가 반도체 생산 주문을 줄인 것에 기인한다. 하지만 각국이 위드(with) 코로나 시대에 적응하고, 포스트(post) 코로나 시대에 대비하기 시작하며 세계 경제가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됐다.
또한, 비대면 기조 확산에 따른 원격 근무 일반화는 소비자향 전자제품들의 수요를 견인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교통 기피에 따른 승용차 판매량의 증가도 불러왔다. 이에 차량용 반도체 수급 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
◇ 기상 이변에 기존 생산량 맞추기 어려워져
차량용 반도체 수급 문제는 기상 이변으로 당분간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 지난 2월, 미국 텍사스에 불어닥친 기록적인 한파는 심각한 전력 부족 문제를 일으켰고, 텍사스에 있는 NXP, 인피니언 등의 공장은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도 현지 시각으로 2월 16일부터 전력 공급이 중단되며 공장 가동을 멈춘 상태다. 일본에선 지진이 발생했다. 르네사스의 주력 생산기지인 이바라키 공장은 지난 2월 13일,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규모 7.3의 지진에 의해 가동을 중단했다.
미세한 공정을 다루는 반도체 설비를 가동하게 시키려면 기나긴 조정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텍사스와 이바라키에 있는 공장들의 재가동에 적어도 1∼2개월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 반도체 대란에 완성차 업체 리스크 커져
차량용 반도체 수급 대란에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멕시코 산루이스 포토시 조립 공장의 생산 중단을 3월 말까지, 미국 캔자스 페어팩스, 캐나다 온타리오 잉거솔 공장은 4월 중순까지 생산 중단을 연장했다. 포드 역시 독일과 브라질 공장 폐쇄에 나서면서 올 1분기 생산량이 최대 20%가량 감소할 전망이다.
독일 아우디도 1만 명 이상의 직원이 휴직에 들어갔고, 폭스바겐은 10만 대 생산 감축을 결정했다. 일본 닛산·혼다, 프랑스 르노·피아트크라이슬러 등도 감산 체제에 돌입했다. 현대, 기아, 르노삼성, 쌍용 등 국내 자동차 업계는 재고 확보와 공급 관리 등으로 당장 문제는 없으나 중장기적 영향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현대·기아차는 차량용 반도체 재고를 보유한 차량 모델 중심으로 생산 라인을 가동하고 있으며, 범용성 반도체는 재고가 거의 소진된 차량 부품에 우선 투입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아울러 매주 재고를 점검하며 반도체 기업과 물량 확보 협상을 직접 진행하는 등, 향후 생산계획을 탄력적으로 조정해 나갈 계획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글로벌 자동차 업계의 올해 매출 타격은 약 607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69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 대란, 3분기까지 간다 “당장 설비 확대 어려워”
IHS 마킷은 올해 1분기 완성차 업체 생산량은 67만2천대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고, 동시에 차량용 반도체 공급 대란이 3분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달아오른 완성차 업체들의 우려에도 대란은 쉽게 끝나지 않을 조짐이다.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늘리려면, 반도체 업체가 소비자향 전자제품 수요에 집중한 역량을 차량용으로 재배치하고, 생산 증설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차량용 반도체 주력 품목인 마이크로컨트롤러(MCU), 전력관리집적회로(PMIC), 미세전자기계시스템(MEMS) 센서 등은 거의 8인치 웨이퍼에서 생산된다. 당장 이달부터 8인치 생산 라인을 증설해도 생산까지 최소 6개월 이상 걸린다.
더군다나 8인치 웨이퍼는 12인치 웨이퍼보다 부가가치가 낮고, 관련 장비 제조 역시 생산이 저조해 가격이 비싸다. 기업 경영 측면에서 8인치 생산 라인 증설은 리스크를 동반한다. 이에 반도체 기업들은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위탁생산 비중을 늘리는 것도 쉽지 않다. 전 세계 MCU 생산의 70%를 담당하는 TSMC의 차량용 반도체 매출 비중은 2020년 4분기 기준 3%에 불과하다. 매출 비중이 낮은 사업에 대한 설비투자를 늘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TSMC 생산 라인은 타 분야 반도체 주문 폭주로 가동률 100%에 육박하고 있다.
◇ 신규 업체 진입 장벽 높지만 투자할 가치 있어
자동차의 목적은 탑승자를 무사히 목적지로 옮기는 것이다. 안전은 자동차가 추구하는 최우선 조건이다. 또한, 자동차의 사용 기한은 다수의 소비자향 전자제품보다 5년 이상 길다. 이에 따라 차량용 반도체는 안전성과 내구성이 중요하다.
새로운 기업이 기존 업체와 비슷한 수준의 차량용 반도체 생산 역량을 단기간에 갖추기 쉽지 않은 이유다.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검증과 안정성 테스트 기간이 메모리 등보다 훨씬 길어 단기간 내 이번 사태 해결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번 사태와 별개로 차량용 반도체 시장의 중장기 전망은 밝다.
차량용 반도체는 자동차의 구동부와 전장부 모두에 탑재된다. 현재 시판 차량에는 2~300개의 반도체가 들어간다. 향후 상용화될 레벨3 자율주행차량에는 2,000개 이상의 반도체가 필요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IHS 마킷은 차량용 반도체 시장 규모가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으로 2020년 전년 대비 9.6% 감소한 380억 달러에 그쳤지만, 올해 반등을 시작해 2026년 676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스태티스타(Statista) 역시 해당 시장이 2040년 1,750억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자율주행 기술 진전이 빠르게 전개되는 동시에, 각국 정부의 탄소제로 정책이 속도를 내면서 전기차, 수소차 시장이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차량용 반도체 수요 역시 크게 증가할 전망이다. 이미 많은 자동차에 첨단 운전자 지원 시스템(ADAS)과 차량용 인포테인먼트(IVI)가 접목되면서 고성능 반도체 수요가 큰 상황이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메모리, 파운드리 시장처럼 절대 강자가 없다. 따라서 우리 기업이 진출하기 적절한 분야다. 텔레칩스는 자율주행 전용 AI 프로세서 개발에 착수했고, 삼성전자는 아이소셀 오토, 엑시노스 오토 등 차량용 이미지 센서와 프로세서를 선보였다.
특히 삼성전자는 지난 1월, 3년 이내로 의미 있는 규모의 인수합병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업계에선 차량용 반도체 업체를 인수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삼성전자가 보유한 현금은 116조2천억 원으로 추정된다. 이는 차량용 반도체 1위 업체인 NXP(시가총액 약 57조 원)의 인수가 가능한 금액이다.